高句麗(고구려)

[스크랩] 대련지구 고구려 산성에 대한 소고

라디오에요 2016. 4. 13. 11:28

대련지구 고구려 산성에 대한 소고


이름: 許明綱
2005/1/7(금)

대련지구(大連地區)에 있는 4개의 고구려 산성에 대한 소고  
이름: 許明綱
작성일:2004.4.24(토) 12:03

자료집

        대련지구(大連地區)에 있는 4개의 고구려 산성에 대한 소고 
                                                      글쓴이 : 許明綱 
                                                      옮긴이 : 徐吉洙      

대련지구(大連地區)는 요동반도 남쪽 ×?자리잡고 있으며, 동․서․남 3면이 황해․발해(渤海)와 맞닿아 있으며 북쪽과 동북쪽은 대륙과 서로 이어져 있다. 대련지구는 긴 해안선이 끝없이 이어져 있고 좋은 항만들이 매우 많기 때문에 예로부터 남북을 오가는 해상과 육상 교통의 뼈대가 되었으며, 중요한 군사기지였다.

이 지역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4개의 고구려 시대 산성이 있는데, 바로 금주구(金州區) 대흑산(大黑山) 위에 있는 비사성(卑沙城), 보란점시(普蘭店市)에 있는 외패산성(巍覇山城), 와방점시(瓦房店市)에 있는 득리사산성(得利寺山城), 장하시(莊河市)에 있는 성산산성(城山山城, 앞 성산산성, 뒤 성산산성 포함)(그림 1)이다.

이 4개의 고구려산성은 역사 문헌에 나온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현지(縣志)에는 모두 나와있으나 그리 상세하지 않다. (중화인민공화국)건국 이래 대련시 문화재 담당자(文物工作者)들이 일부 조사를 하였으나, 그다지 치밀하지 않았고 상세한 문자기록이 없으며 재거나 그려놓은 것이 없어 연구가 더욱 부족하게 됐다. 일부 글이 있지만 소개 정도에서 그치고 깊이 있게 쓴 것이 없다. 이 글은 이전에 조사한 것을 기초로 하여 필자가 직접 조사한 자료를 묶어 대련지구에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4개의 고구려 산성에 대한 초보적 고찰을 하고자 한다. 고구려 전문가와 학자의 가르침을 바란다. 
                                                                
대련지구 고구려 산성의 축성시기를 문헌에서 찾아보면 ꡔ자치통감ꡕ 권 113에 “동진(東晉) 원흥(元興) 3년(404) 겨울 12월, 고구려가 연(燕)을 침입하였다”고 하였다. 김육불(金毓黻)은 ꡔ동북통사(東北通史)ꡕ에서,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은 것은 진나라 원흥 3년(404)의 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 고구려를 살펴보면 진나라 태원(太元) 10년(385) 6월 처음으로 요동과 현도 2군을 함락시켰는데 바로 고구려 고국양왕 2년이다. 또 그 뒤 19년이 지난 진나라 원흥 3년(404), 요동을 다시 함락시키고 현도군도 함께 빼앗았는데 광개토왕 14년이다. 그 뒤 끝내 되찾지 못하다가 (당나라)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668)에 이르러 고구려를 멸망시킬 대 요동이 회복되었는데 빼앗긴지 265년만이었다”고 하였다. ꡔ구당서ꡕ 고려전(高麗傳)에는 “정관(貞觀) 5년(631) (당나라는) 광주독부(廣州督府) 사마(司馬) 장손사(長孫師)를 요동으로 보내 수나라 전사자 무덤의 해골에 제사지내고 그 때 세운 경관(京觀)을 헐어버렸다. 건무(建武, 영류왕)은 그 나라를 칠까봐 두려워 장성을 쌓았는데 동북쪽 부여성에서 시작하여 서남쪽 바다에 이르는 1000리 남짓 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대련지구에 있는 고구려산성 4개는 404년에서 668년 사이에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하였을 때 쌓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요하 동쪽을 따라 동북쪽 부여성(扶餘城)에서 서남쪽 바다까지 1000리 남짓 되는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바로 그 장성 선상의 바다 가까이에 금주 대흑산 비사성과 와방점시 득리사(용담산)산성이 있다. 대련에 있는 산성 4개는 모두 요동반도 남단의 험준하며 수비하기는 쉽고 공격하기 어려운 높은 산 위에 쌓았다. 이것은 요동반도 남단의 황해와 발해 사이에 있는 넓은 땅을 지배하고, 육․해 교통의 중요한 길과 중추를 컨트롤하기 위한 것으로 요동반도 남단의 해역을 굳게 지키는 중요한 전략적 기지이다.  

금주 비사성(卑沙城)은 비사성(卑奢城), 필사성(畢奢城), 대흑산성(大黑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요동반도 남쪽 끝, 황해의 북쪽 바닷가, 금주성(金州城) 동쪽 15리(7.5㎞) 지점에 있는 대흑산 위에 자리잡고 있다. ꡔ요동지(遼東志)ꡕ에는 “대흑산성, 금주성에서 동으로 15리 떨어진 곳인데 산 위에 옛 성이 있다”고 되어 있다. 대흑산은 대혁산(大赫山), 대화상산(大和尙山)이라고도 부르는데 황해와 발해 사이에서 가장 좁은 구역인 金州城 동쪽에 마치 천연장벽처럼 우뚝 솟아있다. 이 곳은 산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바다와 육지를 지키는 요충지이고 고구려가 요동반도 남단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다. 전략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 산동 등래(登萊)에서 바다를 건너오면 모두 맨 먼저 비사성에서 싸웠다.

보란점시(普蘭店市) 왜패산성(巍覇山城)은 오고성(吳姑城)이라고도 한다. 요동반도 남쪽 끝, 벽류하(碧流河)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황해 바닷가에 있는 중요한 성이다. ꡔ요동지ꡕ에 「외패산성은 복주성(復州城) 동쪽 18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원래 복현에 속했는데 지금은 보란점시 성대진(星臺鎭) 포도구(葡萄溝) 외패산 위에 있다.

장하(莊河) 성산성(城山城)은 앞성(前城)과 뒷성(後城_으로 나뉘며 황해의 바닷가, 벽류하 동녘 기슭, 장하시 성산향 성산 위에 자리잡고 있다. ꡔ장하현지(莊河縣志)ꡕ에 「성은(장하)서쪽 90리(45㎞) 지점에 있는 성아산(城兒山)에 에 있다, …… 남북 두 산이 서로 바라보고, 가운데 강(夾河)이 하나 흐르는데, 남쪽에 있는 것을 앞성(前城)이라 하고, 북쪽에 있는 것을 뒷성(後城)이라 한다ꡓ고 하였다. 이 성은 황해 바닷가 동쪽을 지키는 중요한 성이다. 고구려 박작성(泊灼城)의 서쪽, 외패산성의 동쪽에 있다.

와방점시(瓦房店市) 득리사산성(得利寺山城)은 용담산성(龍潭山城)이라고도 한다. 와방점시 득리사진 용담산 위에 자리하고, 발해 동쪽 바닷가에 있으며, 남쪽의 비사성과 북쪽의 건안성(建安城) 사이에 있는 중요한 성이다.

이상의 대형 고구려산성 4개는 그 위치와 전략적 측면에서 볼 때 모두ꡒ서로 소식이 통하고, 긴밀한 공동방어를 할 수 있고, 남북이 서로 뜻이 통하고, 서로 의존하는ꡓ1) 작용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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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지구에 있는 4개의 대형 고구려산성이 갖는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ꡒ험한 산, 단단한 벽, 수원(水源), 문터, 높은 산의 망대ꡓ2)같은 것들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 지키기 쉽고 쳐들어가기 어려운 높은 산 위에 쌓았고, 건축규모가 크며, 높은 산등성이와 가파른 절벽사이에 쌓았으며, 산세에 따라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고, 밖으로 내쌓거나 안으로 들여쌓아 성의 평면배치 구성이 한 가지로 정해진 모양이 없다. 성을 쌓은 돌은 모두 현지에서 캐내 현지에서 가공하여 쌓았다.

금주 비사성 성벽은 청회색 석회암을 가지고 구불구불 오르내리는 대흑산 산등과 높은 절벽 사이에 쌓았다(그림 3). 산등을 돌고 골짜기를 감돌아 불규칙한 원호형(圓弧形) 산성을 이루고 있다. 둘레는 약 5㎞ 남짓 된다(그림 2). 재료로 쓰인 돌은 보통 가공하지 않은 것을 썼고, 건타체법(乾打砌法)을 채용하여 벽 안에 흙을 채웠다, 성안에 있는  두 개의 깊은 천연 계곡을 이용하였다. 깊은 계곡 서남쪽 깊숙한 곳에 골짜기 어귀가 있고, 성문과 수구문은 모두 이곳에 건축하였는데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아 물에 쓸려 무너지고 크게 갈라진 틈만 남아있다. ꡔ요동지ꡕ에 ꡒ성안에 우물이 두 곳 있고 4면이 서로 두드러지게 다르다. 남쪽에만 문이 하나 있는데 어느 때 쌓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ꡓ고 하였다. 성안에 우물이 두 개 있는데 바로 후세 사람들이 전설에서 말하는ꡒ적수호(滴水壺)ꡓ와ꡒ음마만(飮馬灣)ꡓ유적이다. 그 당시 성내에서 마실 물은 산 속 샘물을 이용하였다. 산성 서북쪽 절벽 위에 넓고 평탄한 지역이 있고, 그 위에 네모난 토대(土臺)가 있는데 토대에서 연꽃무늬 수막새를 하나 찾았기 때문에 이것이 망대 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외패산성 성벽은 산세를 따라 구불구불한 산등 절벽 사이에 쌓았다. 재료로 쓰인 돌은 화강암이며, 세밀한 가공을 거쳐 돌덩이 표면 한쪽 끝은 네모꼴이고 한쪽 끝은 뾰족해 못(釘) 같은 꼴이다. 돌담 겉은 매우 가지런하다(그림 4). 성벽을 쌓는 법:산세가 높았다 낮았다 하여 평평하지 않고 대부분 비탈이기 때문에 가공한 돌을 큰 머리 쪽은 밖으로 향해 놓고, 못꼴을 한 작은 머리끝은 안으로 향하게 하여 층마다 서로 겹치게 쌓아 평평하게 하였으며, 찰흙이나 회를 쓰지 않고 틈 사이에 잘게 부순 돌을 채웠다. 이렇게 쌓은 높고 큰 벽은 표면이 아름답고 비탈에다 쌓은 석벽 위가 평평해 진다. 밖에서 안으로 엇갈리게 겹쳐 쌓은 석벽은 매우 견고하여 겉쌓기 한 돌이 헐려도 벽 속은 그대로 남아 무녀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건타루식(乾打壘式)3)으로 쌓는 방법이다.4)

외패산성(巍覇山城) 둘레는 5㎞이다. 성벽의 보존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며 제일 높은 곳은 9.4m이다. 동, 서, 남, 북 네 문을 설치했다. 성안에 도랑이 두 개 있고, 서남쪽에 트인 땅이 한 곳 있으며, 산봉우리에 망대(望臺)가 있다. 서문 있는 곳에 저수지가 있고, 동북 모퉁이에는 작은 성이 하나 있는데 “자금성(紫禁城)ꡓ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성안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그렇기 때문에 성안의 배수시설은 동문 남쪽 크게 갈라진 곳에 설치했다. 갈라진 곳에 높고 큰 배수용 돌담을 쌓았는데 돌담 꼭대기는 성안의 지면과 높이가 같아, 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마치 높은 벽처럼 생겼다. 배수시설은 장하 성산성의 구조와 같다.

득리사산성 성벽도 천연적인 큰 돌덩이를 사용하였고, 약간 가공하여 구불구불한 산등 위에다 쌓았는데 길이가 2,240m에 이르고, 높이는 3m쯤 된다. 남.․북․ 서쪽에는 높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고 동쪽에 계곡 입구가 하나 있다. 계곡 입구에 있는 남북 산봉우리는 앞니(大牙) 두개(二牙)라 부른다. 성에는 문을 두 곳에 설치하였는데, 한 개는 서쪽 작은 산등 우묵한 곳에 있고, 정문은 동쪽 계곡 입구에 있다. 문밖에 옹성(瓮城)을 만들었는데 옹성은 문 옆쪽이 틔어 있다. 동문을 통해서 성안으로 들어오면 평지가 나타나는데, 평지 남쪽에 긴 네모꼴 못이 있다. 길이 36m, 너비 25m이다. 못의 둘레는 큰 돌로 쌓았는데 예부터 “용담(龍潭)ꡓ이라 불렀으며 ꡒ물을 담아두는 못ꡓ이다.

성산성(城山城)은 앞성(前城)과 뒷성(後城)으로 나뉘고 규모가 비교적 크다. 두 성은 깊은 계곡 물을 사이에 두고 멀리 서로 바라보는 자매 성이다. 북쪽 산성을 뒷성이라 하는데 두 성의 건축특징은 같지 않다. 북쪽 성의 구조는 간단하고 재료로 쓴 돌은 약간만 가공하였다. 앞성의 벽을 쌓은 돌덩이는 모두 세밀하게 가공한 것이다. 규모도 비교적 크며 보통 앞성을 성산성이라고 부른다. 성산성도 산등과 산벽 사이에 쌓은 것은 외패산성의 벽 쌓는 법과 같다. 건타루체법(乾打壘砌法)을 써서 밖으로 향한 돌덩이 끝은 가공하여 네모나 긴 네모꼴로 만들고 안으로 향한 끝은 넓고 평편(扁平)하게 하거나 뾰족하게 하여 못 같은 꼴로 만들어 한 층 한 층 엇갈리게 위로 쌓아 표면을 평평하게 하였다. 벽체 사이는 평평하게 한 후 서로 겹쳐 누르거나 잘게 부순 돌을 채웠다. 성벽의 길이는 2,898m이다. 동․서․남쪽에 5개의 문이 있는데 정문은 남쪽에 있고, 바로 앞쪽 맞은편은 계곡이다. 성벽은 잘 보존되어 있는데 제일 높은 곳은 9m, 가장 넓은 곳은 2m이다. 성 동북 모서리 제일 높은 곳에 작은 성이 하나 있는데 보통 ‘자금성(紫禁城)’이라고 부른다. 사실은 망대이다. 성벽 4곳의 감제고지5) 위에도 높은 대(臺)를 쌓았는데 이것도 망대이다. 그 가운데 북쪽 높은 봉우리에 돌로 쌓은 모서리를 둥그렇게 한 네모난 대(臺)가 있다. 기단 너비 7m, 현재 높이 1.9m이다. 쌓은 돌은 11층이고 층마다 올라가면서 14~16㎝ 씩 들여쌓기를 했다. 대(臺)의 기단은 완전하고 재료는 모두 화강암을 잘 갈아서 정밀하게 쌓았다.

성 동남쪽 문에서 붉은 줄무늬 기와를 채집했으며, 동쪽 성벽 안 땅 속에 건물터가 있다.

성안 중심에 돌로 쌓은 저수지가 있다. 남문과 동남문 사이에 터진 곳이 한 군데 있는데 이곳에 큰돌로 둑을 설치에 배수시설을 만들었다. 성안의 지세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기 때문에 물은 반드시 남쪽으로 빠진다. 돌둑의 평면은 활꼴(弧形)을 나타내며, 동서 약 40m, 둑 높이는 3m이다. 둑 꼭대기와 성안의 지면은 (높이가 같아) 평평하다. 둑 아래에 보면 마치 높은 담장 같다. 이런 돌둑은 배수시설로도 쓰이고 또 담장 역할도 한다. 비 오는 계절이 오면 계곡 물을 쏟아내는 것이 마치 폭포와 같아서 장관을 이룬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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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지구에 있는 4개의 고구려 산성 가운데 금주 비사성은 문헌 기록을 가지고 고증한 것이 많이 있고, 와방점시 득리사산성과 장하시 성산성은 비록 고증한 것이 있으나 아직 검토할 점이 있다. 보란점시 외패산성은 아직까지 아무도 운조차 뗀 사람이 없었다. 본문에서 문헌 기록과 4개 산성의 방위 및 당나라 때 고구려를 칠 때 진군노선을 근거로 하여 초보적인 고찰을 하고자 한다.  

수․당이 고구려를 칠 때 수군은 산동 등래로부터 바다를 건너 먼저 비사성을 공격했다.

ꡔ수서(隋書)ꡕ  내호아전(來護兒傳)에 ꡒ대업(大業)10년(614), 주사(舟師)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비사성에 이르니 고구려가 온 힘을 다해 싸우자 내호아가 크게 격파하고 천 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고 하였고, ꡔ구당서ꡕ 고려전에는ꡒ645년,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여 장군 상하(常何)를 비롯하여 강(江), 회(淮), 령(嶺), 협(硤), 날쌘 군사 4만과 전선 500척을 거느리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했다. 5월, 장량의 부장(副將) 정명진(程名振)이 비사성을 쳐서 빼앗았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았다ꡓ고 하였다.

ꡔ신당서ꡕ 장량전에는 “황제가 고구려를 치려할 때 장량이 자주 간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스스로 가기를 청해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이 되어 병사 이끌고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비사성을 쳐부수고 건안성까지 나아갔다ꡓ고 했다. ꡔ자치통감ꡕ 권197에는ꡒ645년, 장량이 주사를 거느리고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비사성을 습격하였는데, 그 성은 4면이 절벽이고 서문을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었다. 정명진은 군사를 이끌고 밤에 이르고 부총관(副總管) 왕문도(王文度)는 먼저 성으로 올라갔다. 5월 기사(己巳),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8000명을 붙잡았다ꡓ고 하였다. ꡔ책부원구ꡕ에는 “645년, 5월 기사, 장량의 부장인 정명진이 비사성을 빼앗았는데 그 성의 4면 절벽이라 서문을 통해서만 공격할 수 있었다. 정면진이 군사를 독려하여 밤에 습격하였다. 부총관 왕문도가 먼저 올라가고 사졸들이 잇달아 나아가니 성안은 무너져 흩어지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았다ꡓ고 하였다. ꡔ요동지ꡕ에는ꡒ당나라 장량이 (주)사를 이끌고 비사성를 쳤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뜻한다ꡓ고 하였다.

위에서 본 문헌 기록을 뭉뚱그려보면 수․당의 수군은 고구려를 칠 때 산동 등래(登萊)에서 바다를 건너 요동반도에 올라 제일 먼저 공격한 산성은 바로 금주 대흑산 비사성이었다. 이 산성은 바로 고구려의 비사성으로, 사학자들이 모두 공인하고 있다.  

득리사산성(得利寺山城)은 금주 비사성과 개주(蓋州) 건안성(建安城)사이에 있고, 고구려 요하 동쪽에 1000리 남짓 이어진 장성의 선상에 놓인 산성이어야 한다. ꡔ자치통감ꡕ에 “645년 10월 고구려를 칠 때 현도(玄菟), 횡산(橫山), 개평(蓋平), 마미(磨米), 요동(遼東), 백암(白岩), 비사(卑沙), 맥곡(麥谷), 은산(銀山), 후황(後黃) 같은 10성을 빼앗았다ꡓ고 하였다. ꡔ동북민족사고(東北民族史稿)ꡕ에서는 “지금 복현(復縣) 득리사산성은 둘레 2,240m, 높이 3m이고 ,동서 두 문이 있는데, 동문이 정문이다. 계곡 입구 문 밖에 옹성이 있고, 성안에 저수지가 있다. 이 성은 금현(金縣) 대흑산성(비사성)북쪽에 있는 맥곡성(麥谷城)이 아닌가 생각된다.ꡓ고 하였다.

ꡔ중국역사지도집 동북지구자료회편(東北地區資料匯編)ꡕ과 진연개(陣連開)의 「당대 요동의 몇몇 지명에 대한 고증과 해석(唐代遼東若干地名考釋)」7)에는 모두 문헌기록을 근거로 하여 득리사산성을 고구려 적리성(積利城)이라고 비정하였다. 그러나 우진달(牛進達) 등이 고구려를 칠 때의 공격진로를 보면 먼저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계속 동쪽으로 갔지 서쪽으로 꺾어 적리성(득리사산성)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 설은 당군(唐軍)의 진군루트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ꡔ신당서』열전 111에 ꡒ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이 평양행군총관(平壤行軍總管)이 되어 비사성을 공격하고 독산진(獨山陣)을 깼다. 모두 적은 수로 많은 무리를 무찌른 것이다ꡓ고 한 문장에서 독산이란 곳이 나온다. ꡔ청일통지(淸一統志)』에 “독산은 영해(寧海, 지금의 금주)현 동북쪽 75㎞ 지점에 있다ꡓ고 했고, 『요동지』권1, 「지리지」에 ꡒ독산성(獨山城)은 (금주)북쪽 75㎞ 지점에 있다ꡓ고 하였다.

위에서 본 기록에 정명진(程名振)은 비사성(지금의 금주 대흑산 위)을 공격한 뒤, 또 북쪽으로 올라가서 독산진(獨山陣)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이 독산은『청일통지』와『요동지』에 모두 금주성 북쪽 75㎞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이 거리는 바로 와방점시(瓦房店市) 득리산성의 위치와 꼭 들어맞고, 당군이 등주에서 바다를 건너 먼저 금주 흑산 비사성을 공격한 뒤 건안성을 향해 공격해 가려면 반드시 비사성과 건안성 사이에 있는 독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야 한다는 사실과도 꼭 들어맞는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이 독산이 바로 지금의 와방점시 득리사산성이라고 보며, 적리성과 맥곡성은 아니다.

다시 필류하(畢流河)8) 서쪽에 있는 외패산성(巍覇山城)과 필류하(畢流河) 동쪽에 있는 성산성(城山城)을 보자.

ꡔ신당서ꡕ 고려전에 ꡒ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우진달(牛進達)이 청구행군대총관(靑丘行軍大總管)이 되고, 우무후장군(右武侯將軍) 이해안(李海岸)이 부장(副將)이 되어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 7월, 우진달 등은 석성을 빼앗고, 나아가 적리성을 공격하여 수 천 명을 베고 모두 돌아왔다ꡓ고 하였다. ꡔ독사방여기요(讀史方與紀要』)에는 ꡒ적리성은 평양 서쪽 국경에 있다. 647년 우진달 등을 보내 바닷길을 따라 고구려로 들어와 석성을 빼앗고 나아가 적리성 아래 이르러 그 군대를 쳤다. 그 가까운 곳에 또 박작성이 있다ꡓ고 하였다.  

ꡔ자치통감』에 647년ꡒ3월 무위대장군 우진달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우무장군 이해안을 부장으로 삼고, 병사 만 여 명을 내어,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들어왔다. 7월 우진달과 이해안이 고구려 국경에 들어와 모두 100번 남짓 싸웠으나 이기지 못한 것이 없었다. 석성을 쳐서 빼앗고 나아가 적리성 아래 이르니 고구려 병사 만 여명이 나와 싸우므로 이해안이 격파하고 2000명의 머리를 베었다ꡓ고 하였다. 장박천(張博泉)이 쓴『동북역대강역사(東北歷代疆域史)』란 책에 적리성은 석성과 박작성 사이에 있다고 고증했다. ꡔ중국역사지도집  동북지구자료회편ꡕ과 진연개(陣連開)의 「당대 요동의 몇몇 지명에 대한 고증과 해석」에서는 석성과 적리성을 모두 요동반도 압록강 입구로부터 서쪽에서 구하며, 석성을 지금의 장하현(莊河縣) 서북쪽 25㎞ 지점에 있는 성산향 사하촌(沙河村)에 있는 山城이라 하고, 또 적리성을 지금의 복현(復縣) 득리사산성이라고 비정하였는데 이것은 당군(唐軍)의 진군노선과 들어맞지 않는다. 『동북역사지리』권2에서는 장하시 성산성을 석성으로 보고 적리성을 석성(성산성) 동북쪽 50㎞ 남짓한 거리에 있는 수암현(岫巖縣) 낭낭성촌(娘娘城村)에 있는 산성으로 정했다.

위에서 본 것을 뭉뚱그려 보면 당나라 때 우진달을 비롯한 수군은 산동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요동에 이르러 요동반도 남단에서 상륙했다. 그 군대는 황해 바닷가를 따라 동북쪽으로 진군해 석성에 이르고, 이어서 동쪽으로 향해 간 것이지,  서쪽으로 꺾어서 득리사산성으로 쳐들어 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득리사산성을 적리성으로 비정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적리성은 규모가 비교적 큰 산성이어야 하는데 수암현(岫巖縣) 낭낭성촌(娘娘城村)에 있는 산성은 규모가 비교적 작아서 적리성이라고 보기는 마땅하지 않다.

필자가 보기로는 당군이 요동반도에 상륙한 뒤, 645年 장량이 군대를 거느리고 먼저 금주 대흑산 위의 비사성을 쳐서 빼앗는다. 그 뒤 우진달을 비롯한 수군은 고구려 평양으로 쳐들어가는데, 요동반도에 상륙한 뒤 100 차례 남짓 싸운 뒤 보란점시 외패산성을 쳐서 빼앗았을 것이다. 그 다음 필류하(畢流河)를 건너 동북쪽으로 장하시 성산성을 쳐들어갔으며, 다시 동쪽으로 박작성(泊灼城)을 쳤다. 이런 노선은 외패산성과 성산성이 있는 지리적 위치와 꼭 들어맞는다. 석성은 장하시 성산성이 아니고 적리성도 득리사산성이 아니라고 본다. 진군루트와 반대쪽이기  때문이다. 또 수암현 낭낭촌에 있는 산성도 아니다. 이 성 둘레가 3.5㎞ 밖에 되지 않아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석성은 보란점시 외패산성으로 비정하고 적리성은 장하시 성산성으로 비정한다. 이렇게 해야 당나라 수군이 석성을 함락한 뒤 적리성으로 쳐들어간 진군루트와 꼭 들어맞는다.  

원 논문 : 許明綱, 「大連地區高句麗四座山城略考」, ꡔ博物館硏究ꡕ 1996-1


출처 : 成 潭 世 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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