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백제)

백제왕기 285년, 286년.

라디오에요 2018. 5. 4. 10:24

백제왕기 고이왕 23년, AD286년.

二十三年 丙午 二月 麗伐帶方 帶方請救 王命太子救之 麗怨我 將欲侵邊 乃發丁夫 修葺慰禮城及阿旦城蛇城而備之 十一月 王薨 太子責稽立 王以太王寵子 孝友愛民 夙興夜寐 勤儉下士 國家大治 而常憂外寇 未常晏居 而薨 春秋五十二 國人痛哀之. 
23년(AD286년) 병오 2월, 고구려가 帶方(대방)을 치자, 帶方(대방)이 구원를 요청하였다. 왕은 太子(태자)에게 명하여 帶方(대방)을 구하도록 하였다. 고구려는 우리를 원망하여 장차 변경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곧 장정들을 징발하여 慰禮城(위례성)과 阿旦城(아단성)과 蛇城(사성)을 수리하여 이를 대비하였다. // 11월, 왕이 죽었다. 太子(태자) 責稽(책계)가 즉위하였다. 왕은 太王(태왕, 肖古王)의 총애를 받는 아들로써, 효심이 깊고 우애가 있으며 백성을 사랑하였다.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며, 아래사람들에게 부지런하고 절약하였다. 國家(국가)가 크게 안정되었지만, 항상 外寇(외구)들 때문에 근심하였는데 늘 편안히 살지 못하고 죽었다. 춘추 52세였다. 나라사람들이 애통해 하였다. 



285년 2월, 帶方 기사 (1년 앞에 등장하는 기사임)


286년 11월, 고이왕이 죽었다고, 백제본기와 백제왕기가 똑같이 적혀 있으나, 奈解紀(나해기) 30년(AD286년) 기사에서는 고이왕은 9월달에 사망했다고 했으므로, 2달 앞서 기록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백제왕기에서는 2월달로 기록된 慰禮城(위례성)과 阿旦城(아단성)과 蛇城(사성)을 수리 기사가 있는데, 이것은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286년)에 나오죠.



백제왕기 고이왕 20년, AD283년.

二十年 癸卯 二月 帶方王沼薨 子虔立 請婚王 以第五女烏古里妻之 
20년(AD283년) 계묘 2월 帶方王(대방왕) 沼(소)가 죽어 아들 虔(건)이 즉위하였다. 왕에게 혼인을 청하니, 다섯째 딸 烏古里(오고리)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麗伐帶方 帶方請救 王命太子救之 麗怨我 <백제왕기 고이왕 23년>



283년에 公孫虔(공손건)이 대방왕이였다니까, 慕容廆(모용외)가 公孫虔(공손건)을 치고, 고구려도 합세해서 공격했나 보군요.


三月 伐帶方 濟人來救 移攻濟城 拔其二 <서천대제기 16년(285년)>


서천대제기 16년(285년), 

이때 慕容廆(모용외)는 公孫虔(공손건)을 공격하고, 구원 요청을 받은 고구려는 되려 백제의 2성을 치고 있죠.

구원을 해 줬어야 할 고구려가 백제를 도와 주지 않았으니, 이는 백제 고이왕과 고구려 서천왕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걸 뜻합니다.

게다가 285년 7월에는 신라가 공격해 오니, 백제는 앞뒤로 곤란을 겪게 됩니다.




백제본기 責稽王(책계왕) 재위 13년 286년 ~ 298년

責稽王[或云 靑稽] 古尒王子 身長大 志氣雄傑 古尒薨 卽位 王徵發丁夫 葺慰禮城 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 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旦城蛇城 備之

책계왕(責稽王)[혹은 청계(靑稽)라고도 한다.]은 고이왕(古尒王)의 아들이다. 키가 크고 뜻과 기개가 웅대했다.

고이왕이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왕이 장정을 징발하여 慰禮城(위례성)을 수리하였다.
高句麗(고구려)가 帶方(대방)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282년) 임금이 帶方王(대방왕)의 딸 寶菓(보과)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왕이 이르기를 “帶方(대방)은 舅甥(구생,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高句麗(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高句麗(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阿旦城(아차성)과 蛇城(사성)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286년)


*책계왕 1년 = 286년.





奈解紀(나해기) 29년(AD285년)

二十九年 正月 昔盧伊伐飡 江氏稟主
29년(AD285년) 1월 석로(昔盧)를 이벌찬에, 강씨(江氏)를 품주로 삼았다.


三月 骨井太子薨
3월 골정(骨井)태자가 죽었다.

七月 連珍大破夫余於烽山城下 殺獲一千餘級 請築城而防之 命康萱築烽山城 螺碧伊伐飡 采氏稟主
7월 連珍(연진)이 夫余(부여)를 烽山城(봉산성) 아래에서 크게 깨뜨려, 1천여급을 殺獲(살획)하였다. 성을 쌓기를 청하여, 이를 방어하였다. 康萱(강훤)에게 명하여 烽山城(봉산성)을 쌓았다. 나벽(螺碧)을 이벌찬으로, 채씨(采氏)를 품주로 삼았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29년 AD224년.

二十九年 秋七月 伊伐飡連珍與百濟戰烽山下 破之 殺獲一千餘級 八月 築烽山城
29년(AD224년) 7월, 이벌찬 連珍(연진)이 烽山(봉산) 아래에서 백제와 싸웠다. 백제병을 격파하고 1천여급을 殺獲(살획)하였다. 8월, 烽山城(봉산성)을 쌓았다.


*61년 편차.


신라본기 기년조작으로 인해, 285년에 신라가 봉산성을 공격한 것도 알지 못 했죠.



奈解紀(나해기) 30년(AD286년)
三十年 正月 淵于伊伐飡 馬淡稟主
30년(AD286년) 1월 연우(淵于)를 이벌찬으로, 마담(馬淡)을 품주로 삼았다.

四月 閱馬于桃山
4월 도산(桃山)에서 말을 검열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紅后生帝女阿爾兮 有五色雲覆之
홍후(紅后)가 왕의 딸 아이혜(阿爾兮)를 낳았는데 오색구름이 아이를 감싸고 있었다.

九月 行一善大場
9월 일선에서 대장을 행하였다.


夫余君尒殂 子責稽立
夫余(부여)의 왕 古尒(고이)가 죽어, 아들 責稽(책계)가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