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왕기> 19p. 비류왕 17년 기사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46년의 구조.
= <백제왕기> 비류왕 17년 + 온조왕 30년의 구조로 되어 있음.
*백제왕기 비류왕 17년. BC2년.
十七年 己未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彌鄒忽也) 王戰敗 憂懣而薨 王弟溫祚統其衆 而繼立爲王 以新都爲慰禮城
17년 己未(기미, BC2년) 봄 樂浪(낙랑)이 쳐들어 와서 慰禮城(위례성, 彌鄒忽也)을 불질렀다. (비류)왕이 전쟁에 패하여 걱정하고 번민하다 죽었다. 왕의 동생 溫祚(온조)가 그 무리를 통솔하였다. 계승하여 왕이 되었다. 새로운 도읍으로 慰禮城(위례성)을 삼았다.
<백제왕기> 비류왕 17년 기사 중에서 憂懣而薨(우만이훙, 걱정하고 번민하다가 죽었다)이라는 문장은 <백제본기> 온조왕 머리기사에 담겨져 있는 문장입니다.
백제본기 溫祖王(온조왕) 재위 46년. (BC18년 ~ AD28년)
始祖 溫祚王·多婁王·己婁王·盖婁王·肖古王
百濟始祖 溫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或云 朱蒙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1)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陁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2)基創業 頗3)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 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4)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疣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北史及隋5)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6)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遂壞其柵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孺留]이 와서 太子(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太子(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天險地利]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BC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그 후 [처음] 올 때 백성(百姓)들이 즐겨 따랐다[百姓樂從]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世系]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씨(氏)로 삼았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BC37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太子(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그저 군더더기 살[疣贅]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었다.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했다는데, 비류는 왜 부끄러워하다가 죽었다고 적혀 있을까요?
앞뒤 문맥이 맞지 않죠.
삼국사기 편집자는 <백제본기> 온조왕 머리기사에서 비류왕에 대해 적어 놓을 때, 정작 비류의 죽음에 대해 설명을 해 줄 문장을 생략해 버렸죠.
그래서 앞뒤 문맥이 맞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문장이였죠.
<백제왕기> 비류왕 17년. BC2년.에서 낙랑이 위례성을 침입해 들어 왔을 때,
비류가 낙랑과 맞써 싸우다가, 전쟁에서 패하여, 걱정하고 번민하다가 죽었다고 적혀 있으나,
그 자세한 내막은 더이상 알수 없습니다.
憂懣而薨(우만이훙)
遂慙悔而死(수참회이사)
다만 문장의 글자가 약간 변경이 되어서 <백제본기>에 올라간 것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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