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33691&cid=62146&categoryId=62146
第十奈解王卽位十七年壬辰 保羅國古自國[今固城]史勿國[今泗州]等八國 倂力來侵邊境 王命太子捺音將軍一伐等率兵拒之 八國皆降 時勿稽子軍功第一 然爲太子所嫌 不賞其功 或謂勿稽曰 此戰之功 唯子而已 而賞不及子 太子之嫌 君其怨乎 稽曰 國君在上 何怨人臣 或曰 然則奏聞于王幸矣 稽曰 伐功爭命 揚己掩人 志士之所不爲也 勵之待時而已
제10대 내해왕(奈解王)이 즉위한 지 17년인 임진년(서기 212)에 보라국(保羅國)과 고자국(古自國)[지금의 고성(固城)이다.]과 사물국(史勿國)[지금의 사주(泗州)다.] 등 여덟 나라가 합세하여 신라의 변경을 침략해 왔다. 왕은 태자 내음(捺音)과 장군 일벌(一伐)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 막게 하니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하였다. 이때 물계자(勿稽子)의 공이 으뜸이었지만, 태자에게 미움을 받아 포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물었다.
“이번 싸움에 이긴 공은 오로지 당신 때문이오. 그런데도 당신은 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태자께서 당신을 미워하기 때문이오. 그대는 원망스럽지도 않소?”
물계자는 대답하였다.
“나라의 임금이 위에 계시는데 신하인 태자를 어찌 원망하겠는가?”
그 사람이 물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임금께 아뢰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러자 물계자는 대답하였다.
“업적을 자랑하고 이름을 다투며 자기를 뽐내고 남을 누르는 것은, 뜻있는 선비가 할 일이 아니오. 힘써 때를 기다릴 뿐이오.”
二十年乙未 骨浦國[今合浦也]等三國王各率兵來攻竭火[疑屈弗也 今蔚州] 王親率禦之 三國皆敗 稽所獲數十級 而人不言稽之功
稽謂其妻曰 吾聞仕君之道 見危致命 臨難忘身 仗於節義 不顧死生之謂忠也 夫保羅[疑發羅 今羅州]竭火之役 誠是國之難君之危 而吾未曾有忘身致命之勇 此乃不忠甚也 旣以不忠而仕君 累及於先人 可謂孝乎 旣失忠孝 何顔復遊朝市之中乎 乃被髮荷琴 入師彘山[未詳] 悲竹樹之性病 寄托作歌 擬溪澗之咽響 扣琴制曲 隱居不復現世
내해왕 20년 을미(서기 215년)에 골포국(骨浦國)[지금의 합포(合浦)다.] 등 세 나라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갈화(竭火)[굴불(屈弗)인 듯한데, 지금의 울주(蔚州)다.]를 쳤다. 그러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하였다. 이때도 물계자가 죽인 적병의 시체는 수십 급이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공을 거론치 않았다.
물계자는 그의 아내에게 말하였다.
“내 들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로움을 만나면 목숨을 바치고 환란을 당해서는 몸을 잊어버리며, 절의를 지켜 생사를 돌보지 않음을 충이라고 했소. 보라(保羅)[발라(發羅)로 생각되는데, 지금의 나주(羅州)다.]와 갈화의 싸움은 진실로 나라의 환란이었고 임금의 위태로움이었는데, 나는 일찍이 내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치는 용맹이 없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매우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오. 이미 충성스럽지 못한 것으로 임금을 섬겨 그 허물이 아버님께 미쳤으니,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소? 이미 충과 효의 도를 잃었는데 무슨 낯으로 다시 조정과 저자를 나다닐 수 있겠소?”
그리고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메고는 사체산(師彘山)[자세하지 않다.]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대나무의 곧은 성질이 병이 되는 현실을 슬퍼하면서 이를 비유하여 노래를 짓기도 하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비겨 거문고를 타며 곡조를 붙이기도 하였다. 그는 그곳에 숨어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https://blog.naver.com/rlarladudtnr/221037154025
[출처]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
勿稽子 奈解尼師今時人也 家世平微 爲人倜儻 少有壯志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 請救 尼師今使王孫捺音 率近郡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 是役也 勿稽子有大功 以見憎於王孫 故不記其功 或謂勿稽子曰 “子之功莫大 而不見錄 怨乎” 曰 “何怨之有” 或曰 “盍聞之於王” 勿稽子曰 “矜功求名 志士所不爲也 但當勵志 以待後時而已” 後三年 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勿稽子斬獲數十餘級 及其論功 又無所得 乃語其婦曰 “嘗聞爲臣之道 見危則致命 臨難則忘[주석238]身 前日浦上竭火之役 可謂危且難矣 而不能以致命忘身 聞於人 將何面目以出市朝乎” 遂被髮携琴 入師彘[주석239]山 不反[주석240]
[번역문]
"물계자(勿稽子)[주석793]는 나해 이사금 대의 사람이다. 집이 대대로 미미하였으나 사람됨이 기개가 커서 어려서부터 장대한 뜻을 가졌다. 그때[주석794]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주석795]가 아라국(阿羅國)[주석796]을 치기로[주석797] 함께 꾀하자[주석798] 아라국에서 사신을 보내와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날음(捺音)[주석799]으로 하여금 이웃의 군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게 하여 드디어 8국의 군대를 패배시켰다.[주석800] 이 싸움에서 물계자는 큰 공을 세웠으나 왕손에게 미움을 샀으므로 그 공은 기록되지 않았다. 어느 사람이 물계자에게 말하기를 “자네의 공이 대단히 컸는데 기록되지 못하였으니 원망하는가?” 하였더니 말하기를 “어찌 원망하리요?” 하였다.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어찌 왕에게 아뢰지 않는가?” 하니 물계자가 말하기를 “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구하는 것은 뜻있는 선비의 할 바가 아니다. 단지 마땅히 뜻을 힘써 연마하며 후일을 기다릴 뿐이다.” 하였다. 그 후 삼년이 지나 골포(骨浦), 칠포(柒浦), 고사포(古史浦)의 세 나라 사람이 갈화성(竭火城)[주석801]을 공격하여오자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하여 세 나라의 군사를 대패시켰다. 물계자는 수십 명을 목베었으나 공을 논함에 이르어서는 또 얻는 바가 없었다. 이에 자기 부인에게 말하였다.
“일찍이 들으니 신하된 도리는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만나면 몸을 돌보지 않는 것[주석802]이라 하였는데 전날의 포상(浦上), 갈화의 싸움은 위험하고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도 목숨을 바치지 못하고,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고 사람에게 소문이 났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저자와 조정에 나가겠는가?”
드디어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들고 사체산(師彘山)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
'新羅(신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南君太子(남군태자)가 正統太子(정통태자)가 되다. 延烏郎(연오랑) (0) | 2019.01.17 |
---|---|
삼국유사 물계자전 2 (0) | 2018.08.19 |
신라 2대 왕 - 大盧帝(대로제) (0) | 2018.05.29 |
天日槍의 시기. (0) | 2018.02.18 |
혁거세 30년 = 대무신왕 20년 = AD37년. (0) | 2018.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