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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奈解王卽位十七年壬辰 保羅國古自國[今固城]史勿國[今泗州]等八國 倂力來侵邊境 王命太子捺音將軍一伐等率兵拒之 八國皆降 時勿稽子軍功第一 然爲太子所嫌 不賞其功 或謂勿稽曰 此戰之功 唯子而已 而賞不及子 太子之嫌 君其怨乎 稽曰 國君在上 何怨人臣 或曰 然則奏聞于王幸矣 稽曰 伐功爭命 揚己掩人 志士之所不爲也 勵之待時而已
제10대 내해왕(奈解王)이 즉위한 지 17년인 임진년(서기 212년)에 보라국(保羅國)과 고자국(古自國)[지금의 고성(固城)이다.]과 사물국(史勿國)[지금의 사주(泗州)다.] 등 여덟 나라가 합세하여 신라의 변경을 침략해 왔다. 왕은 태자 내음(捺音)과 장군 일벌(一伐)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 막게 하니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하였다. 이때 물계자(勿稽子)의 공이 으뜸이었지만, 태자에게 미움을 받아 포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물었다.
“이번 싸움에 이긴 공은 오로지 당신 때문이오. 그런데도 당신은 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태자께서 당신을 미워하기 때문이오. 그대는 원망스럽지도 않소?”
물계자는 대답하였다.
“나라의 임금이 위에 계시는데 신하인 태자를 어찌 원망하겠는가?”
그 사람이 물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임금께 아뢰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러자 물계자는 대답하였다.
“업적을 자랑하고 이름을 다투며 자기를 뽐내고 남을 누르는 것은, 뜻있는 선비가 할 일이 아니오. 힘써 때를 기다릴 뿐이오.”
二十年乙未 骨浦國[今合浦也]等三國王各率兵來攻竭火[疑屈弗也 今蔚州] 王親率禦之 三國皆敗 稽所獲數十級 而人不言稽之功
稽謂其妻曰 吾聞仕君之道 見危致命 臨難忘身 仗於節義 不顧死生之謂忠也 夫保羅[疑發羅 今羅州]竭火之役 誠是國之難君之危 而吾未曾有忘身致命之勇 此乃不忠甚也 旣以不忠而仕君 累及於先人 可謂孝乎 旣失忠孝 何顔復遊朝市之中乎 乃被髮荷琴 入師彘山[未詳] 悲竹樹之性病 寄托作歌 擬溪澗之咽響 扣琴制曲 隱居不復現世
내해왕 20년 을미(서기 215년)에 골포국(骨浦國)[지금의 합포(合浦)다.] 등 세 나라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갈화(竭火)[굴불(屈弗)인 듯한데, 지금의 울주(蔚州)다.]를 쳤다. 그러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하였다. 이때도 물계자가 죽인 적병의 시체는 수십 급이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공을 거론치 않았다.
물계자는 그의 아내에게 말하였다.
“내 들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로움을 만나면 목숨을 바치고 환란을 당해서는 몸을 잊어버리며, 절의를 지켜 생사를 돌보지 않음을 충이라고 했소. 보라(保羅)[발라(發羅)로 생각되는데, 지금의 나주(羅州)다.]와 갈화의 싸움은 진실로 나라의 환란이었고 임금의 위태로움이었는데, 나는 일찍이 내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치는 용맹이 없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매우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오. 이미 충성스럽지 못한 것으로 임금을 섬겨 그 허물이 아버님께 미쳤으니,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소? 이미 충과 효의 도를 잃었는데 무슨 낯으로 다시 조정과 저자를 나다닐 수 있겠소?”
그리고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메고는 사체산(師彘山)[자세하지 않다.]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대나무의 곧은 성질이 병이 되는 현실을 슬퍼하면서 이를 비유하여 노래를 짓기도 하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비겨 거문고를 타며 곡조를 붙이기도 하였다. 그는 그곳에 숨어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삼국유사> 물계자전에서 연대 문제가 있죠.
이에 앞서, 나해왕 4년에는 백제가 신라의 변경을 치는 등, 백제가 주도하여 가야 지역을 흔든게 원인이죠.
그래서 <奈解紀(나해기)>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奈解紀(나해기) 4년, AD260년.
四年 七月 夫余侵境 美羅生河道女河羅
4년(AD260년) 7월 夫余(부여)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美羅(미라)가 河道(하도)의 딸 河羅(하라)를 낳았다.
*나해 4년, 백제가 신라의 변경을 침입함.
奈解紀(나해기) 6년, AD262년.
六年 二月 加耶請和 先是與夫余內應謀反 故將以大兵拔之 其君臣懼而腹之
6년(AD262년) 2월 加耶(가야)가 화친을 청하여 왔다. 예전에 夫余(부여)와 內應(내응)하여 謀反(모반)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大兵(대병)을 일으켜 칠려고 하였다. 그 君臣(군신)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三月 大旱 錄內外因 放其輕罪 淡王太子薨
3월 크게 가물었다. 나라 안팎의 죄인을 기록하고, 가벼운 죄를 지은 자는 풀어주었다. 淡王太子(담왕태자)가 죽었다.
*나해 6년, 가야가 화친을 청해 옴.
2년 전에, 백제가 신라를 쳤는데, 이 때 백제가 단독으로 친 것이 아니고, 가야의 병력들과 연합해서 신라를 공격했을테니까, 가야가 신라에게 화친을 청하게 되었겠죠.
奈解紀(나해기) 11년, AD267년.
十一年 三月 巡視西路
11년(AD267년) 3월, 西路(서로)를 巡視(순시)하였다.
五月 夫余與浦上通謀
5월, 夫余(부여)는 浦上(포상)과 通謀(통모)하였다.
1. 부여와 포상8국이 동맹을 맺음으로 인하여 급해진 것은 신라와 가야이다. 이에 비지가야는 포상8국의 공격을 받을 위험에 처해짐.
2. <고구려사초>에 포상8국의 이름이 사물(史勿), 초팔(草八), 골포(骨浦), 칠포(漆浦), 가리(加利), 성산(星山) 등이라 하였다.
十月 吉斗使加耶
10월, 吉斗(길두)는 加耶(가야)에 사신으로 갔다.
*포상8국의 배후에는 백제가 있었죠.
奈解紀(나해기) 14년, AD270년.
十四年 正月 行白虎祭
14년(AD270년) 1월, 白虎祭(백호제)를 行(행)하였다.
*白虎 = 庚寅 = AD270년.
*AD270년 - AD209년 = 61년 편차.
七月 加耶王子于考太子入 告浦上八國入侵 請求 乃命于考與利音將六部兵 往求之
7월, 加耶王子(가야왕자) 于考太子(우고태자)가 와서 浦上八國(포상8국)이 침입하였다고 고하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于考(우고)와 利音(리음)에게 명하여 六部(6부)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4년
14년 7월, 바닷가의 여덟 나라가 공모하여 가라를 침범하자, 가라 왕자가 구원을 요청했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일벌찬 이음에게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은 여덟 나라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 명을 잡아 돌아왔다.
八月 利音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群臣賀之 乃獻俘獲于祖廟 河道以其女大理妻美知
8월, 利音(리음)이 八國(팔국)의 將軍(장군)을 쳐서 죽이고, 포로 6천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群臣(군신)들이 치하하며, 포로들을 조상의 사당에 바쳤다. 河道(하도)는 그의 딸 大理(대리)를 美知(미지)에게 시집보냈다.
*美知(미지)= 벌휴와 미시의 아들.
奈解紀(나해기) 17년, AD273년.
十七年 三月 加耶王子來 質
17년(AD273년) 3월, 加耶王子(가야왕자)가 와서 인질이 되었다.
*신라가 포상8국을 깨뜨렸지만 그들의 위협이 계속된 듯하다.
五月 大雨 漂毁民屋 大理生美知子車理
5월, 큰비가 내려,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거나 무너졌다. 大理(대리)가 美知(미지)의 아들 車理(차리)를 낳았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7년
17년 3월, 가야가 왕자를 인질로 보내왔다.
5월, 큰 비가 내려 민가가 유실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나해 20년으로 되어 있는데, 실상 <삼국유사> 원본에는 나해 10년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삼국유사>는 포상8국의 난을 나해 17년으로 해놓았는데, 잘못된 것으로, <삼국사기>처럼 나해 14년이 맞습니다.
포상8국의 공격은 나해 14년이 맞고, 竭火(갈화) 공격 사건은 나해 17년이 맞는거죠.
<奈解紀(나해기)>에서는 竭火(갈화) 공격 사건 기사는 빠져 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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