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점제(秥蟬)

라디오에요 2009. 1. 20. 10:19

담하가 돌아와서 형세가 점차 유리해짐을 보고하자 송거가 말했다.

“우리들은 밖에 있어 간고(艱苦)하고 저들은 도성에 있어 안락하니 모사(謀事)는 스스로 같지않음이 있는 것이나 만약 저들과 같이 왕이 크게 민망(民望)을 잃기만을 기다리면서 느릿느릿 도모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소금을 가지고 소의 뒤를 따라가면서 불알이 저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먹으리라.“ 하는 것과 같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모용씨(慕容氏)를 설득해 우리 서변(西邊)을 침범케 하고 우평(于枰)등이 출동해서 그를 막으면 선방(仙方)등이 안에서 난을 일으키고 우리들은 구원하러 간다 칭하고서 병력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가 왕을 죽이고 우리 군(君)을 세워서 모용씨와 더불어 화친하고 남으로 낙랑(樂浪) 백제(百濟)로 내려가면 조업(祖業)이 가히 창성할 수 있다.”

을불은 그 말을 그럴듯하게 여기고 담하에게 명하여 샛길로 하여 바다로 나가서 뱃길을 따라서 극성(棘城)에 이르러 모용외(慕容廆를 설득케 했다.

“대국(大國)이 만약 신(臣) 을불(乙弗)을 위해서 병력을 빌려주어 공을 세운다면 마땅히 세세토록 번방(藩)이 되어 조공할 것입니다.”

모용외가 이를 허락하고 병력을 이끌고 서침(西侵)하였는데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서 약로대왕(藥盧大王)의 릉(陵)을 보고는 사졸들로 하여금 파내게 했다.
담하가 말했다.

“대왕은 의(義)로써 병력을 빌려주고서 어찌 우리 선왕(先王)의 릉(陵)을 파내어 원수를 지십니까?”

모용외가 말했다.

“네 나라가 반복(反覆)하는 까닭에 볼모(質)를 잡고자하는 것이다.”

릉(陵)을 파내는 날, 천기가 음산하더니 갑작스레 추워짐이 마치 엄동(嚴冬)과도 같았다. 때는 대룡(大龍:병진,296년) 8월이었다. 병력을 출발할 때만해도 오히려 늦더위가 남아 있었던 까닭에 사졸(士卒)들은 두꺼운 옷이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얼어 죽은 자가 줄을 잇고(相繼) 또한 광내(壙內)에서 풍악(風樂)소리가 나니 사졸들은 두려워서 감히 능을 파헤치지 못했다. 모용외는 뒤(後)에 신(神)이 있다는 이유로 해서 중지시키고 또 갑작스런 추위에 옷이 없는 까닭으로 하여 퇴각해서 물러갔다.

선방(仙方)등도 또한 외적(外敵)과는 더불어 통모(通謀)할 수 없다하여 움직이지 않은 까닭에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모용외는 우리가 내응(內應)하지 않은데다 헛되이 사졸(士卒)을 상한 까닭에 그를 꾸짖고, 최체부(最彘部) 역시 점제부(秥蟬部)와 함께 교위(校尉)에 병속(幷屬)될 것을 명령하였다.

창포(菖蒲)의 어머니는 본래 점제(秥蟬)로부터 왔는데, 점제(秥蟬)는 그 아들로써 창포를 아내로 맞을려고 교위(校尉)에게 후한 뇌물을 써서 을불(乙弗)을 내쫓으려 했다. 교위가 이로인해 이유없이 질책하며 혹은 부당한 공납(貢)을 요구하니 을불은 실화(失和)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정성을 다했다.

이때 조정(朝廷)은 고노자(高奴子)를 신성태수(新城太守)로 삼아 서북(西北)을 대비하였는데 모용외는 그 위엄과 명성(威聲)을 듣고는 다시는 재침(再侵)할 뜻이 없었다. 오로지 낙랑(樂浪)에만 마음을 두고 5부(五部)를 통솔하고자 모든 부(部)의 영주(領主)들을 점제(秥蟬)에 모이게 하여 맹약(盟約)을 다시 정(定)하도록 했다.

을불은 가고 싶지 않았으나 교위(校尉)가 사람을 시켜 재삼 독촉을 하므로 부득이 창포(菖蒲)와 함께 재생(再生)등을 이끌고서 회맹에 갔다.
서부사자(西部使者) 역시 국경을 정하고자(定界)하여 이르렀는데 교위는 사자(使者)와 상통하고 을불을 포박해서 조정에 송치(送致)하였다. 이에 사자(使者)가 호송하여 가니 곧 황마(黃馬:무오,298년)년 초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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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乙弗大王傳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31.pdf
37p~

을불대왕전의 한대목입니다.

여기서 점제(秥蟬)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점제현신사비로 유명한 그 지명과 같은 지명이죠.

蟬= 매미 선  ㉠매미 ㉡잇다 ㉢뻗다  

蟬은 '제'라는 발음이 더 있는가 봅니다.

"점제(秥蟬)는 그 아들로써 창포를 아내로 맞을려고 교위(校尉)에게 후한 뇌물을 써서 을불(乙弗)을 내쫓으려 했다."

점제부(秥蟬部)는 자기네 아들이 있는데, 창포를 며느리로 삼을려고 사이에서 훼방을 놓은 것이죠.
그래서 을불이 잡히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黏蟬(점선)은 한서지리지 낙랑군 25현에 속한 지명이죠.

(樂浪郡, 낙랑군)
:前漢書 卷二十八 地理志 第八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有雲鄣。縣二十五:朝鮮,□邯,浿水,水西至增地入海。莽曰樂鮮亭。含資,帶水西至帶方入海。黏蟬,遂成,增地,莽曰增土。帶方,駟望,海冥,莽曰海桓,列口,長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鏤方,提奚,渾彌,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蟬入海,行八百二十里。東暆,不而,東部都尉治。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B.C. 108 ~ A.D. 313)

(玄菟郡, 현도군):
玄菟郡,武帝元封四年開。高句驪,莽曰下句驪。屬幽州。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遼山,遼水所出,西南至遼隊入大遼水。又有南蘇水,西北經塞外。上殷台,莽曰下殷。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過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玄菟亭。
(B.C. 107 ~ A.D. 302)

(臨屯郡, 임둔군) (B.C. 107 ~ B.C. 82)
(真番郡, 진번군)(B.C. 107 ~ B.C. 82)

(帶方郡, 대방군)(A.D. 204 ~ A.D. 313)

*봉상제 7년 298년.
◎ 七年 戊午, 正月, <于枰>太輔, <倉助利>左輔, <于刺>右輔, <尙宝>左衛将軍.  二月, <羅>都大霧五日, 不辨人.  九月, <乙弗>, 自<最彘(盖馬之部落>至<秥蟬(盤山界)>, 欲與<帶方>五部會盟, 十月, 為其校尉所獲, 檻送京都. 時, 國中霜雹殺穀, 民飢且困, 怨聲滿路. 宮室之役甚急. <班玉岺>靑玉輸于<西川>, 一人負二玉板連絡長亘, 顚死于道者亦多. 破玉抵罪者, 日以百数, 相與為盜而刼官, 軍·官不能禁之. <乙弗>檻至<酒醬>成街群盜破檻而放<乙弗>. 上, 大怒, 命<方夫>・<于豊>等捕其盜而索<乙弗>. <方夫>・<于豊>皆觀望不力.

○ 7년{AD298}무오, 정월, <우평>이 태보로, <창조리>가 좌보로, <우자>가 우보로, <상보>는 좌위장군이 되었다.  2월, <신라>의 도성이 닷새 동안이나 짙은 안개로 뒤덮여서 사람을 분간할 수도 없었다.  

9월, <을불>이 <최체(개마지부락)>에서 <점선(반산계)>으로 와서 <대방>의 五部과 회맹하려다가,

10월에 그곳의 교위에게 사로잡혀 함거에 실려 경도로 보내졌다.

그때, 나라 안에서는 서리와 우박으로 곡물이 죽어 백성들은 굶주렸을 뿐만 아니라 고단하여 원성이 길에 가득하였다. 궁실의 공역을 매우 급하게 서두르고 있었다. <반옥령>의 청옥을 <서천>으로 날랐는데, 한 사람이 옥판 두 개를 짊어진 것이 줄줄이 길게 뻗쳤고, 길바닥에 엎어져 죽은 사람 역시 많았다. 옥판을 깨뜨려서 죄를 받은 사람도 하루에 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서로 뭉쳐서 도둑이 되고 관을 겁탈하였는데, 군과 관도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을불>을 실은 함거가 <주장>에 이르니, 거리를 메운 도둑들이 함거를 깨고 <을불>을 풀어주었다. 이에 상이 대노하여 <방부>와 <우풍> 등에게 도둑들을 잡아들이고 <을불>을 찾아내라고 명하였으나, <방부>와 <우풍>은 모두 관망할 뿐 힘써 노력하지 않았다.


미천왕이 등극하기 전, 점제(秥蟬)는 고구려와 모용외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한 걸 알 수 있습니다.

점제(秥蟬)는 낙랑군일까요? 대방군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