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1年~33年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32년, 33년, AD157년, AD158년

라디오에요 2009. 10. 29. 14:35

 

 

三十二年 正月 上與史后祇摩愛禮班君受朝于大井 讌嚮兩門 是日 上幸愛禮妃君

32년(AD157년) 1월, 상은 史后(사후), 祇摩(지마), 愛禮(애례), 班君(반군)과 함께 大井(대정)에서 조회를 받았다. 兩門(양문)에서 잔치가 열렸고, 이날 상은 愛禮妃君(애례비군)에게 행차하였다.


三月 復以支所禮爲伊伐飡 毛利稟主 吉公爲骨門角干 樊五爲右頭上

3월, 다시 支所禮(지소례)를 伊伐飡(이벌찬)으로, 毛利(모리)를 稟主(품주)로, 吉公(길공)을 骨門角干(골문각간)으로, 樊五(번오)를 右頭上(우두상)으로 삼았다.


四月 暖生生太子女暖花 太子洗之 大井城門自毁 上謁廟問過

4월, 暖生(난생, 逸聖의 누나)이 太子(태자)의 딸 暖花(난화)를 낳았다. 太子(태자)가 아기를 씻어 주었다. 大井(대정)의 城門(성문)이 저절로 무너져서, 상은 묘를 알현하여 잘못을 물었다.

 

*원본에서 生 탈락으로, 暖生生로 수정.


七月 命中外仙巫祈雨 太子與妃君露日 乃雨 時旱魃橫行三月 民心洶洶 至是始得種播 人以爲太子雨

7월, 中外仙巫(중외선무)에게 명하여 비를 기원하도록 하였다. 太子(태자)는 妃君(비군)과 함께 한데서 3일을 지내니, 이내 비가 왔다. 이때 旱魃(한발)이 3달동안 橫行(횡행)하여, 民心(민심)이 洶洶(흉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播種(파종)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太子雨(태자우)라고 하였다.

 

*処로 수정.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32년, AD111년. 

三十二年 夏四月 城門自毁 自五月至秋七月 不雨

32년(111) 여름 4월에 성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AD157년- AD111년= 46년 편차.   파사 32년으로 일치됨.


九月 太子幸稟主毛利于政堂 兵官逸聖諫之曰 “政堂非吉所 恐爲人譏” 太子曰 “善 吾旣被譏 汝獨無譏 可乎” 乃强使逸聖繼濡之 人非之曰 “誰謂諫之不似甚於贊之 不似邪” 

9월, 太子(태자)가 政堂(정당)에서 稟主(품주) 毛利(모리)와 幸(행)하였다. 兵官(병관) 逸聖(일성)이 간하기를 “政堂(정당)은 吉(길)한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비웃음이 될까 두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太子(태자)가 말하기를 “옳다. 나는 이미 비웃음을 당하였는데, 너는 홀로 비웃음이 없으니 옳으냐?” 라고 하였다. 이에 강제로 逸聖(일성)으로 하여금 이어서 그녀를 적시게 하였다. 사람들이 이를 비난하며 말하기를 “누가 간하는 것이 칭찬하는 것보다 심히 못하다고 말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라고 하였다.


十月 太子閱三軍車騎于北川

10월, 太子(태자)가 北川(북천)에서 三軍(3군)의 車騎(거기)를 사열하였다.

 

 


三十三年 正月 以樊五爲伊伐飡 曷名稟主 支所禮右頭上 扶余骨女加利生上子居利

33년(AD158년) 1월, 樊五(번오)를 伊伐飡(이벌찬)으로, 曷名(갈명)을 稟主(품주)로, 支所禮(지소례)를 右頭上(우두상)으로 삼았다. 扶余(부여)의 骨女(골녀) 加利(가리)가 상의 아들 居利(거리)를 낳았다.

 

*居利(거리)는 박제상의 4대 조상이다.


二月 以玉權爲京軍事 馬知那爲南軍事 虹盧爲北軍事 允良爲神籬將軍 翌宗爲護城大師 逸聖爲京都大頭太子私臣

2월, 玉權(옥권)을 京軍事(경군사)로, 馬知那(마지나)를 南軍事(남군사)로, 虹盧(홍로)를 北軍事(북군사)로, 允良(윤량)을 神籬將軍(신리장군)으로, 翌宗(익종)을 護城大師(호성대사)로, 逸聖(일성)을 京都大頭(경도대두), 太子(태자)의 私臣(사신)으로 삼았다.


五月 上有疾 妃君禱天不寐 上下稱之

5월, 상이 병이 들어, 妃君(비군, 愛禮)이 하늘에 기도하며 잠을 자지 않았다. 上下(상하)가 그것을 칭찬하였다.


七月 上復疾 召太公及左右頭上大井大師太子大師 入寢殿 傳位于祇摩太子 太子號泣 受之 大赦 天下呼太子小今

7월, 상이 다시 병이 들어, 太公(태공, 摩帝)과 左右頭上(좌우두상, 吉元과 支所禮), 大井大師,(대정대사, 昌永), 太子大師(태자대사)를 불러 寢殿(침전)으로 들어 오게 하였다. 祇摩太子(지마태자)에게 王位(왕위)를 傳(전)하였다. 太子(태자)가 소리내어 울며 그것을 받았다. 대사면을 하였다. 天下(천하)가 太子(태자)를 小今(소금)이라 불렀다.


十月 上夢見惠后 喉渴而崩 史后引小今于仙寢 而行祥 葬上于蛇陵門 以允良爲伊伐飡 吉元爲神籬將軍 昌永爲左頭上 君乙爲水酒太守

10월, 상은 꿈에 惠后(혜후)를 만나고, 목구멍이 말라서 죽었다. 史后(사후)가 小今(소금)를 仙寢(선침)으로 데리고, 제사를 행하고, 蛇陵門(사릉문)에 상을 장사지냈다. 允良(윤량)을 伊伐飡(이벌찬)으로, 吉元(길문)을 神籬將軍(신리장군)으로, 昌永(창영)을 左頭上(좌두상)으로, 君乙(군을)을 水酒太守(수주태수)로 삼았다.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33년, AD112년.

三十三年 冬十月 王薨 葬蛇陵園內

33년(112) 겨울 10월에 왕이 죽어 사릉원 안에 장사지냈다.

 

*AD158년- AD112년= 46년 편차.   파사 33년으로 일치됨.

 

十一月 上與史后愛禮受大朝于南桃 以愛禮爲雌神聖母 史后爲太聖 加耶世主正見殂 子朱日立 自稱阿豉今

11월, 상(祗摩)은 史后(사후), 愛禮(애례)와 함께 南桃(남도)에서 큰 조회를 받았다. 愛禮(애례)를 雌神聖母(자신성모)로, 史后(사후)를 太聖(태성)으로 삼았다. 加耶世主(가야세주) 正見(정견)이 죽고, 아들 朱日(주일)이 즉위하였다. 自稱(자칭) 阿豉今(아시금)이라 하였다.

 

*AD158년은 朱日(주일)이 즉위한 대가야의 건국년도이다.


十二月 上立先今廟于高井 命王女十二人分朔遞祭之 擇六部仙女三十六人妻雪草兩童 命十部王子主其吉于鮑祠 行先今大祭于新廟 炬火連十里 先今性溫慈好仁 節儉省用 愛民如己 御下以道 勞來諸候 疆土益加 亦中興之聖祖也

12월, 상(祗摩)은 高井(고정)에 先今(선금)의 廟(묘)를 세웠다. 王女(왕녀) 12명에게 명하여 달을 나누어 번갈아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六部(6부)의 仙女(선녀) 36명을 택하여, 雪童(설동), 草童(설동) 兩童(양동)에게 시집보냈다. 十部(10부)의 王子(왕자)들에게 명하여 鮑祠(포사)에서 그 결혼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新廟(신묘)에서 先今大祭(선금대제)를 거행하였다. 횃불이 10리에 이어졌다. 先今(선금)의 성품은 溫慈(온자)하였고, 仁(인)을 좋아하였고, 절약하고 검소하였고, 비용을 줄였으며, 자신처럼 백성들을 사랑하였다. 道(도)로서 아래사람들을 다스렸고, 諸候(제후)들을 勞來(노래)하였고, 疆土(강토)는 점점 늘어났으니, 역시 中興(중흥)의 聖祖(성조)였다.

 

*朔= ③ 달수를 나타내는 말.

*앞에서는 六部라 하고 뒤에는 十部라 하였다.

*파사이사금 당시 병합된 주변 영토는 推火(추화, 129년 2월), 居陀(거타, 144년 9월), 押督(압독, 151년 2월), 悉直(실직, 151년 2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