倭(왜)

應神(응신) 22년(358년)- 應神(응신) 元年(원년)= 337년(丁酉)

라디오에요 2012. 6. 30.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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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정복 동사강목 제2상

乙卯(을묘년), 신라 유례왕 12년(AD295년), 고구려 봉상왕 4년, 백제 책계왕 10년(진 혜제 원강 5년, AD295년).

 

봄, 계림이 왜를 정벌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신라 왕이, 왜인이 자주 침범하여, 백성을 편안히 살지 못하게 함을 분히 여겨, 백제와 함께 동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에 들어가 칠 것을 도모하니, 서불한(舒弗邯) 홍권(弘權)이 간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험난을 무릅쓰고 원정(遠征)하면 생각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백제는 속임수가 많고 항상 병탄할 욕심을 가지고 있음에리까? 더불어 도모할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좋은 말로 여겼다.

 

【안】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槎錄)》에는,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단지 그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明石浦)는 대판(大阪)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롱(丘隴)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白馬)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 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應神) 12년 辛亥(신해, AD291년)가 바로 유례왕 8년 해당되니,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인데, 東史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儒禮尼今紀 8년= AD357년 (丁巳).

*儒禮尼今紀 9년= AD358년 (戊午).

*신라본기 유례왕 8년(AD291년, 辛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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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禮尼今紀(유례니금기) 9년, AD358년. 戊午.

九年 正月 奈宗伊伐飡 道明稟主
9년(AD358년) 1월, 내종(奈宗)을 이벌찬으로, 도명(道明)을 품주로 삼았다.


二月 帝以倭寇如鼠竊 欲滅其國而除根 弘權諫曰 “彼地遠 莫預度 吾人不習於水 不可遠征 况夫余多詐乎” 乃止
2월, 왕이 왜구(倭寇)가 쥐새끼와 같이 도둑질하니, 그 나라를 멸망시키어 뿌리 뽑기를 원하였다. 홍권(弘權)이 간하여 말하기를 “저 나라의 땅은 멀고 미리 헤아리기 어려우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에서 싸우는 것에 대해 배우지 못하였으므로 원정을 하는 것을 불가합니다. 하물며 부여(夫余)는 속임이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그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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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臨尼今紀(기림니금기)3년, 丙寅(병인), 366년. 1월.
三年 正月 與倭復和親
3년(AD366년) 1월, 倭(왜)와 다시 和親(화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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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본기 유례이사금 12년, AD295년. 乙卯.

十二年 春 王謂臣下曰 倭人屢犯我城邑 百姓不得安居 吾欲與百濟謀 一時浮海 入擊其國 如何 舒弗邯弘權對曰 吾人不習水戰 冒險遠征 恐有不測之危 況百濟多詐 常有呑噬我國之心 亦恐難與同謀 王曰 善

12년(295) 봄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왜인이 자주 우리의 성읍(城邑)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가 없다. 나는 백제와 꾀하여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들어가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서불한 홍권(弘權)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에서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왕이 '옳다'고 하였다.

 

*358년 - 21년= 337년(丁酉)= 應神(응신) 元年(원년).

 

331년= 辛卯

332年= 壬辰

333年= 癸巳

334年= 甲午

335年= 乙未

336年= 丙申

337년 = 丁酉

http://www.highlight.jp/06.html

위 동사강목(東史綱目)에 나오는 내용이 일본의 연대기(年代記)에도 나온다.

백마총에 관하여 일본의 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豊臣秀吉の朝鮮出兵によって戦争状態のままになっていた日韓関係を修復しようとして、徳川家康は高僧玄蘇(げんそ)を朝鮮に派遣した。その結果、1609年の己西条約として講和が成立したが、そのとき、朝鮮の答礼使節として来日した呉允鎌(オユンキヨム)の通訳として随行してきた李恵稷(イヘジク)は、『日本年代記』なる書物を見ている。それには「応神22年新羅軍が 襲来して きた。戦いに敗れた応神天皇は、大坂から百里離れた明石浦で降伏した」と記録されていた(当時の1里は現在の400メートル強)。さらに幕府の役人の案内で赤間関へ行ったところ、東の岡の上に一つの塚があった。役人によると、それは白馬塚と呼ばれるもので、降伏の誓いの印に白馬の首を斬って埋めたものであり、このとき、吉備国地方の六つの県を新羅に割譲したという。赤間関とは赤馬関ともいい、現在の下問市のことで、明治35年、赤間関から下関に呼称を変更しているが、白馬塚のことはなにも伝えられていな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으로 전쟁상태로 되어 있는 한일관계를 복원하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승(高僧) 겐소(玄蘇)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 결과 1609년 조약으로 강화가 성립됐지만, 그 때 조선의 답례(答禮) 사절로 일본에 온 오윤겸(呉允鎌)의 통역으로 온 이혜직(李恵稷)은 "일본연대기"라고 하는 책을 보았는데, 그 것에는 "응신(応神) 22년 신라군이 내습 해오자 전투에서 패한 応神天皇(응신천황)은 오사카에서 백리 떨어진 아카시우라(明石浦)에서 항복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막부 관리의 안내를 아카마세키(赤間関)에 간 바, 동쪽 오카의 윗쪽에 한 개의 무덤이 있었다. 관리에 따르면, 그것은 백마총이라는 것으로, 항복의 맹세 표시로 백마의 목을 베어 매장한 것이며,이때 길비국 지방의 6개 현을 신라에 양도했다고 한다. 아카마세키(赤間関)는 아카마세키(赤馬関)라고도 하며 현재 下問市인데, 메이지 35년, 아카마세키에서 시모노세키로 호칭을 변경하였으나, 백마총에 대해 아무 것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吉備国には近年まで新羅邑といわれる土地があったといわれており、広島県には現在でも世羅郡、世羅町という地名が残っている。世羅が

新羅を意味することはいうまでもない

 일본의 대화지방(大和地方)과 가까운 오카야마현(岡山縣) 전역, 히로시마현(廣島縣) 동부, 가가와현(香川縣), 효고현(兵庫縣) 서부, 아코시(赤穗市)의 일부에 걸친 지역은 고대에 길비국(吉備國: 기미쿠니)이라는 지방국가가 있었다. 그곳에는 최근까지도 신라읍(新羅邑)이라고 불리우는 땅이 있었다고 하며, 히로시마(廣島)에는 지금도 세라군(世羅郡), 세라마을(世羅町)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는데, 세라(世羅)는 '신라'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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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註)皇學叢書(황학총서)7,

物集高見  編

 

廣文庫刊行會  

 

1928


 (원문보기 가능)

http://www.dlibrary.go.kr/JavaClient/jsp/wonmun/full2.jsp?v_kw_str=총서&v_db=17&v_doc_no=22059&mode=1

 

螢蠅抄(형승초) = 719
  序 = 715
  引用書目 = 715
第一卷 = 719
第二卷 = 723
第三卷 = 753
第四卷 = 776
第五卷 = 810
附錄 = 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