祗摩紀(지마기)1年~33年

祗摩紀(지마기) 9년~ 10년 (AD167년~ AD168년)

라디오에요 2009. 11. 17. 06:18

 

 

九年 正月 以天公爲伊飡 大惠爲稟主 乃天惠聖母之父母也 以大公彡胡爲匝判 洪刀爲水路軍事 馬日神籬將軍

9년(AD167년) 1월, 天公(천공)을 伊飡(이찬)으로, 大惠(대혜)를 稟主(품주)로 삼았다. 곧 天惠聖母(천혜성모)의 父母(부모)이다. 大公(대공)과 彡胡(삼호)를 匝判(잡판)으로, 洪刀(홍도)를 水路軍事(수로군사)로, 馬日(마일, 日知의 아들)을 神籬將軍(신리장군)으로 삼았다.

 
四月 上謂言只所聖人曰 “爾神靈乎” 曰 “靈未知也 只言只也” 上曰 “何謂言只” 曰 “言只卽發不二也 不拘驗 不驗也” 上曰 "善" 乃賜聖人爵阿飡 先是 有白亥祠 在神林池中 有兩白亥與七鷄爭技 俗傳不可使外人見之 權妻之不及寵者多生私子 皆委於祠主 育爲鷄亥 上幼時爲所引常觀其枝 及長 護其祠 至是 知其鷄亥多私宮人 欲誅之 召其聖人試之 聖人不諱直言 上嘉之 乃止 遂以其祠爲言只所 命馬政大頭賜治疫藥師十二人白馬

4월, 상은 言只所(언지소) 聖人(성인)에게 말하기를 “너의 신은 귀신이냐?” 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영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言只(언지)입니다.” 라고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어떻게 言只(언지)를 말하겠느냐?” 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言只(언지)는 곧 두 가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잡히지 않는 경험은 경험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은 "옳다" 라고 하며, 이에 聖人(성인)에게 벼슬 阿飡(아찬)을 하사하였다. 앞서 神林池)중에 白亥祠)가 있었는데, 白亥)와 七鷄)가 있어, 양쪽이 기예를 겨루었는데, 세속에는 전하지 아니하고 바깥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였다. 權妻) 중에서 총애를 받는 자가 私子)를 낳은 자가 많아 모두 祠主)에게 맡기었다. 白亥), 七鷄)로 키웠다. 왕이 어렸을 때는 업신여겼으나, 이곳으로 끌려와 항상 그 기예를 관찰하였다. 장성함에 이르자 그 사당을 보호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鷄亥)를 알게 되었다. 궁인들과 사사로움이 있어 목을 베려하였으나, 그곳의 성인을 불러 시험하였다. 성인은 직언을 기피하지 아니하니 왕이 기뻐하며, 이에 그치도록 하였다. 드디어 그 사당을 언지소(言只所)라고 불렀다. 마정대두에게 명하여 역병을 치료한 약사 12명에게, 대백마를 하사하였다.

 

*言只(언지)는 위화진경초에 나온다.

 

 


十年 正月 翌宗伊飡 狗日稟主 昕連水路 洪刀京路 玉權西路 莫兮北路 逸聖南路 雄宣護城 林權爵阿飡

10년(AD168년) 1월, 翌宗(익종)을 伊飡(이찬)으로, 狗日(구일)을 稟主(품주)로, 昕連(흔련)을 水路(수로)로, 洪刀(홍도)를 京路(경로)로, 玉權(옥권)을 西路(서로)로, 莫兮(막혜)를 北路(북로)로, 逸聖(일성)을 南路(남로)로, 雄宣(웅선)을 護城(호성)으로 삼았고, 林權(임권)은 阿飡(아찬) 벼슬을 받았다.

 
二月 築大甑山城 以屏旨爲城主 汗門之子也

2월, 大甑山城(대증산성)을 쌓았다. 屏旨(병지)를 城主(성주)로 삼았는데, 汗門(한문)의 아들이다.

 
三月 言只所聖人果多黑齒爲阿飡 群臣爭之 上曰 “爾等不知其骨品 朕獨知之” 人以爲獨知阿飡 盖爲鳥好大母之私子故也 汗門爲神籬將軍

3월, 言只所(언지소) 聖人(성인) 果多黑齒(과다흑치)를 阿飡(아찬)으로 삼았다. 群臣(군신)들이 이를 따졌다. 상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그의 骨品(골품)을 모른다. 짐 혼자 그를 안다.” 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獨知阿飡(독지아찬)이라 생각하였다. 아마도 鳥好大母(조호대모)의 私子(사자)였기 때문이다. 汗門(한문)을 神籬將軍(신리장군)으로 삼았다.


四月 野人加乙五古等 以爲厚福太子之命 奪我船舶 昕連縛獻 至未幾 野人大至 皆爲昕連所敗

4월, 野人(야인) 加乙(가을)과 五古(오고) 등이 厚福太子(후복태자)의 명이라 하며, 우리의 船舶(선박)을 빼앗았다. 昕連(흔련)이 (그들을) 捕縛(포박)하여 바치려는데, 얼마 되지 않아 野人(야인) 많이 도착하였으나, 모두 昕連(흔련)에게 패배당하였다.

 

*135년 9월 기사와 위의 기사가 연관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상장돈장에서 厚福(후복)은 유리이사금과 아혜의 아들로 나온다.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10년, AD121년.

十年 春正月 以翌宗爲伊湌 昕連爲波珍湌 林權爲阿湌 二月 築大甑山城 夏四月 倭人侵東邊

10년(121) 봄 정월에 익종(翌宗)을 이찬(伊湌)으로 삼고 흔련(昕連)을 파진찬(波珍湌)으로 삼았으며, 임권(林權)을 아찬(阿湌)으로 삼았다. 2월에 대증산성(大甑山城)을 쌓았다. 여름 4월에 왜인(倭人)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였다.

 

*AD168년 - AD121년 = 47년 편차.

 

 
七月 逸聖京路 洪刀南路 先是 上酷愛逸聖 至是譴出 旋入

7월, 逸聖(일성)을 京路(경로)로, 洪刀(홍도)를 南路(남로)로 삼았다. 이에 앞서 상은 逸聖(일성)을 매우 총애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十一月 以扶余骨女加利爲五品權妻 克乃爲七品權妻 加利皃美而善生子 上寵愛之 呼以羊介 言其善生而美也 以外女爲權妻自加利始 以上女臼君爲阿瑟羅女主

11월, 扶余(부여)의 骨女(골녀) 加利(가리)를 五品權妻(5품권처)로, 克乃(극내)를 七品權妻(7품권처)로 삼았다. 加利(가리)는 용모가 아름답고, 아기를 잘 낳았다. 상은 그녀를 총애하여, 羊介(양개)라고 불렀다. 아기를 잘 낳고 이쁘다는 말이였다. 外女(외녀)를 權妻(권처)로 삼는 것이 加利(가리)로부터 시작되었다. 상의 딸 臼君(구군)을 阿瑟羅(아슬라)의 女主(여주)로 삼았다.

 

*법흥왕의 어머니 延帝夫人(연제부인)이 加利(가리)의 자손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지증왕의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