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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ul.waseda.ac.jp/kotenseki/html/ri05/ri05_01940/index.html 日本書紀 어느 판본을 고름.
http://archive.wul.waseda.ac.jp/kosho/ri05/ri05_01940/ri05_01940_0005/ri05_01940_00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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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書紀』卷九 神功皇后 攝政五十二年(壬申 二五二)九月丙子《十》◆
五十二年秋九月丁卯朔丙子。久氐等從千熊長彦詣之。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及種種重寶。仍啓曰。臣國以西有水。源出自谷那鐵山。其邈七日行之不及。當飮是水。便取是山鐵。以永奉聖朝。乃謂孫枕流王曰。今我所通海東貴國。是天所啓。是以垂天恩。割海西而賜我。由是國基永固。汝當善脩和好。聚歛土物。奉貢不絶。雖死何恨。自是後。每年相續朝貢焉。
일본서기 신공 52년 기사는 띄워쓰기와 해석에서 오류가 나 있습니다.
*(壬申 二五二) 으로 수정합니다. 壬申(임신)년= 252년이라서 日本書紀 text판에서 오류가 났더군요.
어떤 이는 久氐(구저)를 주어로 설정해서 해석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뒷부분의 내용과 서로 충돌이 일어납니다.
첫번째 화자는 久氐(구저)가 아니고, 千熊長彦(천웅장언)입니다.
以永奉聖朝。乃謂孫枕流王曰。
=> 以永奉聖朝乃謂孫。枕流王曰。
= 聖朝(성조)를 오래도록 받드는 것은 바로 孫(손)을 말합니다. 枕流王(침류왕)이 말하길, "
'孫(손)'은 禮記(예기)에 나오는 표현으로 '順(순), 順理(순리)'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해석이 이렇게 됩니다.
以永奉聖朝乃謂孫。枕流王曰。
= 聖朝(성조)를 오래도록 받드는 것은 곧 順理(순리)입니다." 枕流王(침류왕)이 말하길, "................."
千熊長彦(천웅장언)이 枕流王(침류왕)에게 아부성 멘트를 한 것입니다.
*奈勿大聖神帝紀(내물대성신제기) 383년 기사에서, 千熊長彦(천웅장언)은 말을 잘 하는 인물이라고 하며.. 또한 熊彦(웅언)이라는 인물로 나옵니다.
汝當善脩和好
앞 문장을 久氐(구저)로 주어로 설정해서 해석을 하니, 뒤에 오는 문장과 충돌이 일어나지요.
久氐(구저)가 침류왕에게 말을 하고, 또 다시 말을 또 거는 식으로, 기존에는 해석해 왔던 것입니다.
汝當善脩和好 이 문장은 반말투로 왕이 신하에게 하는 말입니다.
사신 久氐(구저)가 침류왕에게 반말하는 형식의 해석이 되어 버리니, 신하가 왕에게 반말하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거죠.
게다가 문맥도 서로 맞지 않는 해석이 되어 버리고요.
그러니, 침류왕이 우선 熊長彦(천웅장언)을 말을 듣고, 침류왕이 다시 화답하는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띄워쓰기를 수정하여, 해석을 해 볼게요.
★『日本書紀』卷九 神功皇后 攝政五十二年(壬申 二五二)九月丙子《十》◆
五十二年秋九月丁卯朔丙子。久氐等從千熊長彦詣之。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及種種重寶。仍啓曰。臣國以西有水源。出自谷那鐵山。其邈七日行之不及。當飮是水。便取是山鐵。以永奉聖朝。乃謂孫。枕流王曰。今我所通海東貴國。是天所啓。是以垂天恩。割海西而賜我。由是國基永固。汝當善脩和好。聚歛土物。奉貢不絶。雖死何恨。自是後。每年相續朝貢焉。
= 久氐(구저)등이 千熊長彦(천웅장언)을 따라서 이르러, 즉시 七枝刀(칠지도) 一口(1구), 七子鏡(칠자경) 一面(1면)과 여러가지 重寶(중보)를 바쳤다. (千熊長彦이) 이내 啓(계)하길, "臣(신)의 나라의 서쪽에 水源(수원)이 있는데, 谷那鐵山(곡나철산)에서 나옵니다. 그 먼 곳은 7일동안 가더라도 도달하지 못합니다. 일찍히 이 물을 마셔 보고, 즉시 이 山鐵(산철)을 取(취)하였습니다. 聖朝(성조)를 오래도록 받드는 것은 곧 孫(손, 順理)을 말합니다." 枕流王(침류왕)이 말하길, "지금 내가 海東(해동)의 貴國(귀국)과 통하는 바는 하늘이 啓(계)하는 바이다. 이리하여 (天皇이) 天恩(천은)을 베풀어, 海西(해서)를 떼어서 나에게 하사하였다. 이 때문에 나라의 기초가 영원히 단단해졌다. 그대는 일찍이 和好(화호) 닦기를 잘 하였고, 土物(토물)을 聚歛(취렴)하여, 奉貢(봉공)이 끊어지지 않으니, 비록 죽더라도 어찌 恨(한)스럽겠는가?" 이후부터 매년 서로 朝貢(조공)을 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침류왕은 385년에 사망하고, 천웅장언은 383년때의 사람이므로,
이 신공 52년 기사는 384년이나 385년쯤에 왜의 천황(인덕천황)이 백제 枕流王(침류왕)에게 七枝刀(칠지도)를 선물로 보낸 것이 됩니다.
칠지도는 고사기 기사를 근거로 하여,
378년쯤(??) 橫刀가 백제에서 왜로 가고,
일본서기 신공52 기사를 근거로 하여,
384년 or 385년쯤에 七枝刀가 왜에서 백제로 가고,
석상신궁에 있는 칠지도는 왜에서 선물받은 칠지도를 백제 기술자가 모방을 하여 제작을 한 후에,
409년쯤 백제의 사신에 의하여, 백제에서 왜로 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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